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하오의 파도

독로역정 본문

나 좋은 사람 아닌데요

독로역정

융부 2021. 9. 18. 13:45

'천로역정'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천의 순례와 내 삶의 방향성을 같은 직선위에 올려놓는다. 솔직히 이 책을 그렇게 기대하면서 독서모임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는데, 역시나 뛰어나신 하나님의 타이밍은 나에게 적절한 시기에 순례의 길 위에 고민하고 무너지며 다시 일어나는 주인공을 보여주신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두려울 정도로 놀랍다.  이 책이 나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하여 두 챕터씩 나눠 읽는데, 빨리 읽지 않아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순례의 처음에도 있으며 중간에도 있기에(아직 끝챕터는 멀었다). 

 

이 책을 읽은 건 처음이지만, 이 책의 존재에 대해선 문학전공자라면 접해봤을 터이다. 그래서 책의 서문에 글의 형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만났을 때에 내가 듣고 배웠던 것들이 생각나면서, 나의 순례의 첫 지점에 대해 생각이 나는 것이다. 대학교 2학년. 그러니까 몇 년 전 쯤인데, 문학이라면 거창하고, 글이라는 것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글속에 무언갈 전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건지를 생각하던 때이다. 순례라고 말하면 거창했나? 어찌되었든 새로운 자아가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으니까. 어찌보면 소설도 그러하였다.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형식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덩달아 발전하면서 생겨난 일이었고, 번연(이렇게 발음하는게 맞나?) 작가는 그 형식에 본인의 꿈과 상상을 마구마구 집어넣었다. 

 

지금 나는 대학교때의 일과는 상관없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문학 전공생의 태반이 그러할라나, 아니면 순수학문이라는 것이 원래 그러할까. 문학은 아니고 언어라는 것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지만, 문학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문자가 문학이 될때에 섬세하게 다가오는 마음만큼은 내 마음어디선가 자리를 꽉 차지하고 나아갈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래서 일례의 일들을 통해 문학이라는 놈을 다시 찾아가면, 그 어리고 순수한 마음만치도 같이 뒤따라 오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대학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지독한 현실과 무심한 사회가 순수하리만치 겸손한 마음을 짓눌러버리곤 했다. 나는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들 속에서 방향성을 잡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방향성인데, 뭔가 방향을 잡으려고만 하면 꺾이고 꺾이고 또 꺾여서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선형의 20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구심력이 필요없다!!! 라고 외치고 싶지만, 현실이 자꾸 중력처럼 나를 끌어당긴다(이런 비유가 떠오르는 건 요새 물리를 좀 보고 있어서인가). 그래서 묵묵하게 자기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이 책을 만난 것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단어지만 Schicksalsfaden 인지도 모른다. 

 

첫 나눔시간에도 언급했지만, 가장 놀라우면서도 왜 알지 못했던가 자책도 했던 장면은 순례의 길을 떠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좌절의 늪. 첫단계여서 간단하게 뛰어넘을 것 같지만 순례는 고만고만한 언덕넘기가 아니다. 나를 반대하고 나를 막아서려는 사람들을 통과할지라도 첫 발자국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는 나의 마음의 관성을 이겨내는 힘이었다. 좌절. 낙심. 실망. 그리고 우울한 모습으로 후회하게 만드는 감정의 찐득이들말이다. 찐득찐득 아무리 뜯어내려도 해도 늪을 벗어나지 않으면 계속해서 밑으로 꺼져만가는 마음들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좌절이 찾아올 때가 마지막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했고, 그건 마치 Ephiphany 처럼 계몽의 빛이 임하는 각성으로 이겨내는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했지만, 결심의 일들은 매일이 결론의 다다르는 고된 역정이었다. 이 부조리함!! 이 솔직하고도 불가능한 것같은 순례의 묘사가 오히려 삶에서 겪어내는 좌절과 낙심의 일들을 정확하게 묘사해 내더라. 책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감정들로 이름을 지어주는데, 어쩜 위선과 허례가 가득한 내 마음이 좌절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은 책과 같다. 

 

이래저래 책을 읽으면서 순례라는 것이 내 삶에 유효한 단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은 과연 책의 순례처럼 일직선으로, 또는 한 목적을 갖고 이어져있는 것인지도 상상하게 된다. 유학길에 오르려고 하는 지금, 가고자하는 나라로의 길이 어떤 순례의 목적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순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독일행 준비가 더 와닿는다. 그리고 독일행을 준비하면서 몇번이고 이 길이 맞나 생각한다. 과연 내가 독일을 가는게 맞는건지, 나는 왜 가야하는지, 가서 뭐를 할 건지. 그리고 다 떠나서 갈 수 는 있는지 현재의 상황 속에서 셈을 해본다. 사연없는 가정이 어디있겠냐만, 이런 상황 저런 상황을 들면서 이게 가는게 맞나. 지금 이러고 있는게 맞나 생각이 든다. 좌절은 아니기에 늪이라 할 수 없지만, 마치 반대방향 에스컬레이터를 탄 느낌이 들때가 있다. 재정상태도 그렇고 비자문제도 있고 홀몸이 아니기에 혼자 가는 것 또한 고민해보게 되고 무엇보다도 내 실력이 영 늘지 않아서, 수많은 기회비용을 하늘에 뿌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책에서는 이런 감정을 겁쟁이라고 하더라 ... 솔직히 읽으면서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앞에 무시무시한 일들이 있는 걸 보고 뒤돌아오는 감정의 이름을 겁쟁이라고 하더라. 물론 현실의 조건을 따져보는게 현실에서 정말 겁쟁이는 아니지만 순례라는 건 한 번 앞으로 가면 절대로 뒤돌아올수 없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도 쉽게 갈수 도없는길. 책은 챕터들의 소제목을 통해서 또 깊은 울림을 주는데, 누구도 대신 갈 수 없는 길이라 묘사한다. 그리고 치열하나 승산있는 길이라고. 죽을 위기가 수도 없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죽지는 않는 길이었다. 마음의 순례와 더하여 정말 지금 가고 있는 길을 순례위에 올려 놓을 때 정말 겁쟁이 처럼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다. 계속해서 현실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고, 가면 안되는 걸 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책에서 전도자나 천사가 순례자를 도와준것처럼 찬양이나 글이나 성경이나 사람을 통해서 다시 힘을 내게 해주신다. 정말로 내 관여와 의지 없이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작은 문을 열어 주신다.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목표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 일이 어제도 일어났다. 

 

한동안 DaF 시험이 열리지 않아서 독일에 가서 봐야하는 건가 싶었다. 디지털 시험이 새로 생겨서 그거 준비하고 있지만, 그게 또 확실히 열리는지 말해주지 않아서 준비하면서도 마음이 뜨고, 그러다 보니 실력도 늘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주변 나라에 가서 보고 와야 하나 싶어 비행기표와 자가격리 수칙을 검색해보길 반복했었다. 그 비용이면 월세 몇번을 낼 수 있는 비용이었으니,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수준이어서, 허탈하게 느낀적도 많았다.  그런데 어제 아침 수업 시작 전에 시험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선생님이 DaF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시험이 갑자기 새로 생겼다고 했다. 엥 그럴리 없는데, 분명 공지사항란에는 올해 시험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싶어서 나도 들어가보니 떡하고 조선대 다프 신청! 이라는 칸이 파란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더라.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는데, 그럼에도 시험에 등록할 여유가 없었다. 거의 200유로 가까이 되는 금액이 수중에 있을리가 있나. 불쌍한 유학생은 한달한달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이런 시험금액은 미리 준비해놓아야하기 때문에 갑작스런 지출은 불가능했던 터였다. 엄마카드롤 써볼까 생각해서 긁어봤는데도 엄카는 해외결제가 막혀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드를 건네주시는 선생님.

 

내가 뭘 잘했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더라. 당장 한달 반뒤에 AS시험과 DaF 시험 두개를 치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걸 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먼저드는거 보면 난 참 멍청한 겁쟁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참 감사하더라. 나 이거 시험보게 해달라고 하나님한테 여러번 때썼었다. 하나님 시험이 안열려요.. 기회가 없어요 하면서 말이다. 뭐 여튼 정말 잘되었다. 하나님이 좁은 문을 하나 여셨다. 그 문으로 달려가라고, 방향성을 주신 하루 였다. 

 

이 시기에 순례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서 감사하다. 그리고 크리스쳔이 말한 것처럼.. 정말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가는게 아니라는 걸 새겨본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과정인걸까, 그렇다면 저 두개 시험도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여신 것이겠지? 교만이 아니라 노력으로 교만과 겁쟁이 사이의 간극을 채우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 시험을 통과한다고 한들 여전히 높은 벽과 상황, 아니 더 높고 더 어려운 상황만 가득하다. 크리스쳔은 그럼에도 걸어가더라. 멋쟁이다. 

 

한달 한달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놀라울 정도의 삶들, 때로는 비참하게 느껴지다가도, 때로는 너무도 감사하게 느껴지는 나날들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이고 나선형인지 직선형인지 알 수 없는 길이지만, 종종 어둠 가운데 작은 빛의 줄기를 보내주시는 아버지에게, 그 아버지에게 여한 없이 달려가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이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외치는 힘

 

'나 좋은 사람 아닌데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년 10월 7일의 단상  (3) 2024.10.07
뮌스터 융부  (0) 2023.11.05
청년부 나눔 이야기  (0) 2021.09.12
"우리 아내는요, ... "  (0) 2021.08.25
나의 세계여행  (0) 2021.08.24